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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온건 공화파의 독백 역사



'우리 삶의 문제들을 생각할수록,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은 자를 위해 이시스 여신과 네프티스 여신에게 의지했듯, 

우리를 평가하고 판단해 줄 존재로서 풍자의 신과 연민의 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든다. 

풍자와 연민은 좋은 조언가다.

풍자는 그녀의 웃음으로 삶을 즐겁게 하고

연민은 그녀의 눈물로 삶을 위로해 준다.

내가 의지하는 풍자의 신은 잔인하지 않아서

사랑도 아름다움도 비웃지 않는다.

친절하고 상냥한 그녀가 선사하는 미소는 편안함을 안겨준다.

나약한 존재인 우리는 흔히 악당과 바보에게 증오심과 경멸감을 품는데, 그보다는 미소를 짓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대육군의 사격훈련에 대해 역사


나폴레옹 시기 프랑스군과 관련해 가장 광범위하게 알려진 신화 중 하나는 "프랑스군은 사격술이 떨어졌다" 혹은 "프랑스군은 사격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다"에요. 

이는 으레 프랑스군은 총검을 선호했느니, 나폴레옹은 사격술의 중요함을 알지 못했다로 이어지기도 하죠. 

하지만 깊게 파고 들어보면 애초에 흑색 화약 시기 각국의 군대들은 전열 보병 개개인의 사격술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어요. 
오히려 알려진 것과 다르게 나폴레옹은 사격훈련의 중요성을 항상 역설하곤 했죠. 

"프랑스군은 1년에 고작 2발의 실사격훈련을 했다." 과연 이는 사실일까요?

물론 해군의 포탄으로 여겨지며 비교적 소수의 직업군인으로 운영되던 영국군에 비해 대규모 징집병을 운용하던 프랑스군이 사격훈련에 더 불리한 건 사실이었어요. 게다가 이들은 자주 대규모 실전을 겪었고. 때문에 신병 교육은 그 자체로 애를 먹는 일이었죠. 더 큰 문제는 대혁명으로 인해 프랑스 내부의 산업이 완벽히 망해버렸다는 것이었어요. 
전임자들이 산업 전반을 하도 끔찍하게 망쳐 놓은 덕에 나폴레옹은 당장 머스킷부터 라이플, 제복, 납 탄환까지 대부분의 군수품 충당에 애를 먹었죠.

1804년 프랑스 신병들은 대대당 250kg의 화약과 125kg의 탄환을 지급받았는데 1발당 1.05온스(29.7그램)쯤 하던 샤를르빌 머스킷 탄환의 무게와 초기 프랑스군 보병 대대 편제 (총원 1060명 중 머스킷 휴대 대략 1000명)에 대입해서 계산하면 1명당 4.2발의 탄환이 사격훈련 용으로 지급되었단 뜻이 되어요. 분명히 많은 양은 아니었고 남는 화약은 공포탄 사격으로 때우곤 했죠. 

하지만 나폴레옹은 보병들의 사격술을 증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보나파르트는 그 출발로 1805년 볼로뉴에서 영국 정복을 위해 훈련받던 영국 원정군에게 상당히 많은 탄약을 지급했는데 이들이 얼마나 많은 탄약을 받았을지 확실히 알긴 어렵지만 그 결과는 스페인 연합함대가 트라팔가에서 모두 날아가 버린 뒤 황제가 사령부 탁자의 지도를 영불해협에서 동방으로 바꾼 이후 나타났죠.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750자루의 샤를르빌 머스킷을 장비한 프랑스 10 경보병 부대는 1000자루의 툴라 머스킷으로 무장한 2개 러시아 대대와 사격전을 펼쳤는데 양쪽 다 전열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러시아군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어요.

"프랑스 전열은 카멘스키 연대에게 아주 날카롭고 살인적인 머스킷 사격과 산탄 사격을 가해 왔다. 많은 병사들이 전투 불능상태가되었다" - 러시아 장군 랑게론의 기록

"3천 명의 프랑스 전열이 3천 명의 러시아군에게 사격을 가했고 사격전 끝에 오스트리아군이 패주하자 러시아군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툴라 머스킷이 기본적으로 샤를르빌의 카피 버전임을 생각해보면 양쪽 무기의 성능 차이는 크게 없다 볼 수 있고 결국 사격술의 차이가 결과를 갈랐다 볼 수 있는데, 동시기 러시아 머스킷병과 척탄병은 연간 3발의 사격훈련을 받았는데 이는 프랑스군 보다 상당히 낮은 수치였어요. 러시아 경보병은 그보단 나은 6발의 사격훈련을 받았지만 이는 동시기 오스트리아 보병의 사격 양과 같은 수치였고. 역시 프랑스 군보단 낮은 편이었죠.

이후 대육군 보병의 훈련 사격량은 1807년엔 9발로 늘었는데. 청년근위대와 같은 정예부대는 매주 3발의 사격훈련을 진행했어요. 당시 시점에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상당한 양이었죠.

프랑스 보병의 사격훈련은 세로 167cm 가로 50.8cm 크기의 과녁에 행해졌는데. 과녁 가운데와 윗부분엔 3인치 크기의 밝은 조준점이 하나씩 찍혀있었어요. '머리든 심장이든 적은 죽는다.'

병사들은 91m 182m 심지어 364m 거리에서도 사격을 했는데[이 경우엔 급조된 거대한 타겟에 쏘곤 했어요]우수한 성과를 낸 부대는 대육군지에 부대명이 오르는 영예와 함께 포상도 받곤 했죠. 

경험많은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목표를 정확히 겨누고 쥐어짜듯 방아쇠를 당기라 조언했고.(총을 접해본적 없는 신병들에게 총은 그 자체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어요. 커다란 소음과 불꽃, 반동을 내뿜는 살인 도구였죠.)
45미터 에선 무릎을, 90미터에선 가슴을, 180미터에선 머리를 조준하라 가르쳤어요.
이는 낮은 탄속덕에 초반부 치솟았다가 낙하하는 머스킷의 탄도를 고려한 가르침 이었죠.

이런 사격술 훈련은 프랑스군에겐 약이, 그 적들에겐 불운이 되었는데 칼라브리아에서 14 경보병 부대의 전위를 매복 기습한 반군 중 한 명은 274m 나 되는 높다란 고지에서 프랑스 군을 향해 바위를 굴렸어요. 그는 긴 거리 때문에 프랑스군이 자신을 맞출 수 없으리라 확신했지만, 부사관 한 명이 자신의 머스킷으로 단 한 방에 그를 쓰러뜨렸죠. 

나폴레옹 전쟁 최후기인 백일천하 시기 프랑스 보병의 사격 훈련량은 12발에 달했는데 일부 보병 연대들은 40발에 달하는 사격훈련을 하기도 했죠.

[1806년 즈음 보급되기 시작한 신형 원통형 군모 샤코. 프랑스 경보병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샤코를 받침대로 삼아 영국군 장교들을 저격하는 묘기를 보여주었어요.]


그렇다면 '1년당 실사격 훈련 2발'의 신화는 어디서 생겨난 걸까요?

답은 간단한데 러시아 원정 이후 베테랑 군대가 와해되자 급조된 신병 "마리 루이즈"들이었어요.
급박한 전황 속에 제대로 훈련을 받을 시간, 물자조차 없던 이 풋내기 소년들은 1년 평균 사격 훈련 2발이라는 최소한의 훈련만 받고 전장으로 투입되었는데. 이들은 아주 용감했지만 훈련도로 보기엔 제대로 된 군인이라 보기 어려운 병력이었고 (
당시 보병은 단순히 제식과 열 맞추어 걷는 것 외에도 많은 걸 배웠어요. 사격술, 효과적인 장전 방법, 매복 중 적을 충분히 끌어당긴 다음 사격하기, 방진을 만들어 기병에 대응하기, 진군하며 사격하기와 공격술, 방어술, 총검술까지대육군의 사격술과 전술에 대한 잘못된 인상과 루머를 심어주는데도 일조했죠.



Preterism 역사

로마 가톨릭과 교황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 넘쳐나던 시기, 유행을 못 따라가서 아직도 지구가 피자빵처럼 납작하다 믿던 청교도 친구를 교화하던 청교도 네덜란드인은 친구의 질문을 듣고 말문이 막혔어요. 


"잠깐만, 정말 지구가 둥글 다면 예수께서 재림하셨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재림 장면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전 그 답을 모르지만 신학자들은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고민했을 것이고 답을 알 고 있을 거에요.
신학자들은 그 외에도 많은 문제에 대해 고민, 토론, 대립했고 가끔 싸우기도 했죠.
그런 신학적 논쟁 중 한가지가 바로 종말의 예언은 언제 이루어질까 였어요.

종말의 환란은 언제 일어나고, 적그리스도는 누구고, 승천은 언제 이루어질까? 
답은 아무도 모른다 였어요. 그저 금방 온다고만 할 뿐. 성경에 정확한 날짜가 적혀있질 않으니까요. 
답을 못 내는 문제는 다룰 필요가 없고 불을 붙여도 금방 식기 마련이죠. 

이처럼 예언이 이미 이루어진 일인지 아니면 이후에 일어난 일인지에 대한 논쟁은 오랜 세월 있어왔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된  메시아가 십자가에 오른 지 1500년 뒤였어요.

그 계기는 한 독일인 성직자가 로마 가톨릭의 타락을 비판하며 시작한 작은 망치질이었고 이는 곧 전 유럽을 뒤흔드는 지진이 되어 유럽을 둘로 쪼갰죠. 

신교 측은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우상숭배를 비판하며 교황이 바로 신약에 예언된 적그리스도라 주장했고 구교 측에겐 이런 신성모독적 공격에 대한 날카로운 반박이 필요했어요. 

여기 펜대를 메고 나선 건 스페인의 지성인이자 예수회 수사 루이스 델 알카자르(1554–1613) 였죠.


그는 1614년 자신의 저서 Vestigatio arcani sensus in Apocalypsi(묵시록의 신비한 의미에 대한 연구)에서 신약에 나온 환란과 적그리스도의 예언은 기원후 1세기에 네로로 이미 이루어졌기에 교황과 가톨릭은 적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주장했어요. 

Preterism(과거주의)의 태동이었죠.

신교에선 당연히 이에 반박하며 예언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미래주의를 주장했고 과거주의는 한동안 가톨릭의 전유물이었지만 네덜란드 신교 학자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에 의해 신교 측에서도 다루어지기 시작했는데 1640년 ‘Commentary on Certain Texts Which Deal with Antichrist'(적그리스도를 다루는 글에 대한 확실한 논평)에서 그는 다니엘서를 근거로 계시록의 환란과 적그리스도가 1세기에 이미 출현했다 주장했어요. 

휴고 그로티우스



그의 주장은 네덜란드 개신교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헤인(Thomas Hayne)과 해먼드 (Hammond)가 그의 주장을 이어받아 과거주의를 영국 개신교에 전파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이들은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추구하는 온건 개신교로써 적그리스도의 출현, 대환란이 1세기에 이미 이루어졌다 믿었지만 절대 믿지 않은게 단 한가지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예수의 재림만은 절대 건드릴수 없는 미래의 약속이었고 이는 가톨릭에게도 마찬가지였죠. 이를 부분적 과거주의라 불러요.

하지만 뭐든 온건파가 있다면 급진파가 태어나기 마련, 이후 예수의 재림까지도 이미 1세기에 이루어졌다 믿는 '완전 과거론'이 1730년 피르망 아부지(Firmin Abauzit)에 의해 주장되었고 1845년엔 미국 신학자 로버트 타운리 (Robert Townley)가 '주 예수재림 : 과거의 일'을 출판하며 완전 과거주의를 집대성했지만 큰 반향은 얻지 못했어요.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가까웠고 소위 '완전 과거주의' 혹은 '하이퍼 과거주의'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배척 당했어요 구원자의 재림을 약속으로 믿는 기독교에게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고 지금도 이단으로 취급받고 있어요.

그렇다면 세속 관점에서 부분적 과거주의와 미래주의는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미래주의는 환란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신도들에게 더 엄격한 종교적 자세를 요구했어요. 

이런 전형적인 엄숙한 개신교도들의 이미지는 특히 근대기 미국에서 널리 퍼졌는데 '근면한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수행하고, 성공을 이루는게 신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고 그렇게 쌓은 부는 나쁜것이 아니다.'라는 특유의 청교도적 자본관과 합쳐진 미래주의는 미국의 정체성 형성에 거대한 역할을 했고 해방 이후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죠.
여기엔 경제의 발전이라는 순기능도 있었지만 종종 급진 하이퍼 미래주의가 사이비와 합쳐져서 휴거 소동을 일으키기는 부작용을 만들기도 했어요.

반대로 환란이 이미 지나갔다 여기는 과거주의는 분파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조금 더 부드럽고 유한 모습이었고 이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다른 색채를 가지는데도 일조하게 되었어요.


시리아 유감

만약 정말 트럼프가 쿠르드족을 버리고 시리아에서 손을 뗀다면 그건 인류애와 자유세계에 대한 배신이 될 거에요. 

반인륜 범죄자, 독재자들의 승리가 되겠죠.

영국 경찰과 프랑스 경찰의 시작은 어떻게 달랐을까 역사

영국인들은 권위주의를 싫어해요. 
전통은 좋아하지만 권위는 싫어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정확히는 정부가 간섭하는 걸 안 좋아하죠. 


때문인지 중세 영국엔 오랫동안 경찰이란 게 없었는데 만약 강도나 도둑이 들면 해결책은 두 가지였어요. 

소리 지르기 or 10인대 

소리 지르기는 모두가 이해하셨을 거예요. 누군가 "강도야!"라 소리 지르면 소리를 들은 이웃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강도를 때려잡는 거죠. 

못 들으면? 










10인대는 조금 생소하실 텐데. 이는 티(Tything)이라 불렸어요.

ty+thing 직역하면 10개란 뜻의 이 고대 영단어는. 12살 이상의 성인 남성(과거엔 성인의 기준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죠 12살이면 어른임) 10명이 모여 상부상조하며 치안을 담당하는 제도였죠. 10명은 서로를 감시하며 누군가 범죄를 저지르면 모두 힘을 합쳐 체포해야 했는데. 이를 어기면 연대 책임을 물어야 했어요.

10세기 등장한 티싱은 오래가지 않아 외지인의 침략으로 인해 변화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덴마크인 크누트 대왕 두 번째는 프랑스의 정복왕 윌리엄이었어요. (영국을 정복하면 대왕이나 정복왕 명함을 얻을 수 있음)

크누트는 10인조를 100명으로 늘렸고 이는 당시엔 Frith-borh (평화의 보증) 후대엔 프랭크플레지(Frankpledge)로 불리게 돼요.

왜 프랑크냐고요? 프랑스에서 온 정복자 때문이죠.


영국을 정복한 노르망디공 윌리엄은 연고가 없던 섬나라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평화의 보증 제도를 이용했는데 그는 이 100인대에 프랑스식 봉건 시스템을 삽입했어요. 

주민 10명을 모아 100인대를 만들고 100인대에 대장이자 치안 관인 컨스터블(이는 고대 로마의 마구간 관리인, 이후 중세 프랑스에선 영주의 기병 대장이었는데 1032년부턴 왕의 무관장으로 사법과 군대를 담당하는 직책이 되었죠.) 을 왕이 지정하고, 그 100인대를 여럿 모아 샤이어를 만든 다음 샤이어의 대장을 샤이어 리브 (Shire reeve)라 불렀죠.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면 맞아요, 이는 이후 셰리프(보안관)가 되는 명칭이에요. 


컨스터블 - 왕이 임명한 100인대의 대장이자 치안관


프랑크플레지의 멤버들은 자기들 중 누군가가 죄를 짓는다면 그의 도주를 돕지 않겠다 보증했고 이를 어기면 자신의 재물로 배상했어요. (영미법의 뿌리 깊은 금전적 배상)

이제 중세 영국은 행복했을까요?

아뇨 어떻게 보증을 섰는데 행복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전 국민이!




이후 프랭크플래지는 200년 넘게 지속되었지만 결국 연대보증 제도는 주민들을 억죄고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버렸어요.
이건 치안기관도 뭣도 아니었고. 재판은 원님 마음대로, 범인은 안 잡히면 그만. 

프랭크플래지가 치안 제도로써 제 기능을 못하자 에드워드 1세는 1285년 프랭크플래지를 폐지하고 새로운 치안 법령인 에드워드 법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도시의 경비와 야경을 다룬 법령이었어요.

크든 작든 영국의 모든 도시엔 야경꾼이 순찰을 해야 했고 15세부터 65세까지의 모든 남성은 집에 무기를 배치해 필요시 범죄자를 체포하는 것을 도와야 했죠.

이 에드워드 법령은 영국 경찰의 전신으로 불리며 1829년 수도경찰청이 창설될 때까지 자그마치 500년 넘게 유지되었는데 말만 경찰대의 전신이지 한마디로 치안을 주민에게 일임한 형태였어요.

현대적 전문 경찰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시스템이었죠. 

런던의 야경꾼 - 상태 안 좋음




이는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대원수인 마레슈시와 Maréchaussée. 대무관장인 코네타빌 Connétablie이 왕의 부하로써 좀 더 전문적인 치안을 담당하던 것과 비교되는데 저 둘은 단순한 치안 단체가 아니라 군대였지만 어찌 되었든 '치안도 담당하는 비교적 전문적인 집단'이었어요.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정복자(?)이 자 르네상스 왕 프랑수아 1세 때 마레슈시는 코네타빌에게 흡수되었고 
이때 군사적인 색채를 크게 잃고 치안조직으로써 정체성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최초의 비밀경찰이기도 해요.
왕의 비밀경찰들은 곳곳에 숨어 왕께 불충한 무리나 신교도들을 색출해 학살하는데 큰 공을 세웠죠.
이 비밀경찰들은 여러 의미로 모범적인 게슈타포의 선배들이었어요.

"폐하,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 3명 중 1명은 우리 비밀경찰입니다"

앙투안 데 사틴 (Antoine de Sartine)
루이 15세의 경찰 국장 (lieutenant général de police)





여하튼 마레슈시는 1720년엔 왕실 근위대인 장다마리와 합쳐진 뒤 1779년 한 번 더개편을 겪었고 완벽한 치안유지 기관이 되었지만 대혁명 때 혁명을 진압하다 미운 털이박혀 혁명정부에 의해 해산 된 뒤 치안의 부재를 실감한 혁명 정부에 의해 지금의 1791년 부활해 국가 헌병대(gendarmerienationale)가 되었죠.. (현대 프랑스 경찰과 국가 헌병대는 또 서로 별개의 조직이지만 거기까지 다루면 글이 너무 길어짐으로 언젠가 다루겠어요)


대혁명기 프랑스 국가 헌병대 
군대 같지만 경찰입니다. 근데 군대임.
 험한 세상이었으니까요.


현대 영국도 군인같은 무장 경관들이 순찰을 돌죠.
험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최초의 현대적 경찰로 영국의 수도 경찰을 떠올리는 건 다른 목적 없이 오직 순수하게 치안만을 담당하는 최초의 조직이기 때문인데, 사실 1720년 혹은 1791년 창설된 프랑스 국가 헌병대 또한 분명한 경찰 조직이었어요. 18세기 내내 프랑스와 영국 모두 이들을 POLICE라 지칭했죠. (나폴레옹 전쟁 시기 수많은 영국 스파이들을 콩밥 먹인 이들을 도대체 누가 경찰이 아니라 하나요) 심지어 중세기 마레슈시 또한 영국에 비하면 상당히 전문적인 사법 집단이었는데 

프랭크플레지와 에드워드 법령으로 사실상 경찰력이란 게 존재하지 않던 중세- 르네상스 영국에 비해 동시기 프랑스는 도시부터 한적한 농촌까지 치안이 상당히 양호한 편이었어요. 물론 근대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구요.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인들은 이런 프랑스 경찰을 '외세의 상징' '억압과 폭군의 상징'이라부르며 두려워하고 조롱했죠.
이들에게 경찰은 곧 왕의 수하였고 이는 민주주의의 종말이었거든요.
때문에 경찰 창설에 대한 요구는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그때마다 영국 의회는 거품을 물고 반대했죠.
물론 프랑스제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반대를 외치는 국민성 때문 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구가 불어난 영국의 범죄는 견딜 수 없는 수준으로 폭등했고 
영국 전역이 범죄로 헬게이트가 되자 의회는 결국 1829년 뒤늦게 런던 경찰을 창설하는데 동의했죠.



All Along The Watchtower

지금보다 이 노래가 더 잘 어울리는 시기가 있을까.




광대가 도둑에게 말했지
분명 여기서 벗어나는 어떤 방법이 있을 거야
여긴 너무도 혼란스러워서
여유를 가질 길이 없어

사업가들, 그들은 나의 와인을 마시지
농부들은 나의 땅을 파헤치고
줄을 선 사람 중 누구도 그 가치를 모르고 있어

도둑이 상냥히 말했지
흥분할 필요 없어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인생이 단지 농담이라 느끼거든
하지만, 아 그래 하지만 우린 산전수전 다 겪었잖아?
시간이 너무 늦었어
그러니 우리 이제 거짓된 이야긴 나누지 말자
탈출은 우리의 운명이 아니야

모든 감시탑에서
왕자들은 여인의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네
맨발의 시종들도,
저 멀리 어디선가 야생 고양이가 울기 시작하고
두 명의 말 탄 자가 다가오며
바람은 울부짖기 시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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