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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3 역사

킹스 벤치 감옥은 채무자들을 위한 감옥이었어요. 

다양한 이유로 빚을 못 갚은 사람들은 빚을 갚을 때까지 이곳에 갇혀 있어야 했죠. 

오늘날 개인 회생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시엔 목숨을 걸 만큼 큰 문제였던 거 같아요. 

비록 죄수 신분이지만 그는 감옥생활 동안 아내와 함께 머물 수 있었는데 80일이 지나도 석방될 기미가 전혀 안 보이자 브루넬은 러시아 차르에게 자신을 풀어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러시아를 위해 일하겠단 편지를 보냈죠. (그는 이미 1814년 차르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터널을 공사해 달란 부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노력의 효과는 대단했는데, 차르가 관심을 보이자 우수한 공학자를 러시아에 빼앗길걸 두려워한 영국 정부가 직접 움직인 거예요.

웰링턴 공이 나서서 직접 그의 빚을 구제해 주었고 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죠.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그에게 일생일대의 대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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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주제를 돌리자면, 런던은 연약한 지반 위에 세워진 도시에요.

바다와 강은 런던에 번영을 가져다준 천연 교역로였지만 반대로 장애물이기도 했죠.

템스강은 그다지 깨끗하지 못한(제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작은 강이지만 헤엄쳐서 건널 수 있는 강은 아닌데 문제는 13세기에 지어진 런던다리와 18세기에 지어진 리치먼드 다리를 빼면 통과할 수 있는 다리가 없었단 거예요.

런던다리는 거대하고 멋진 다리였지만 수도의 교통을 모두 감당하기엔 턱도 없었고 이는 심각한 약점이었죠.

당시 범선은 돛대 높이때문에 낮은 다리를 지나갈 수 없어서 다리 높이는 한없이 높아져야 했고 이는 건설도 어렵고 지나기도 어려웠어요.

그때 누군가 다리가 없으면 터널을 만들면 되지라 말했죠.

근데 19세기 초에 수도 아래로 거대한 해저(?) 터널을 뚫는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해보니 실제로 말이 안 되었어요.

역사상 가장 거대한 터널 공사에 유명한 엔지니어들이 여럿 달려들었다가 물을 먹었거든요. (그중엔 유명한 리처드 트레비식도 있었죠.) 템스강 아래로 터널을 공사하는 건 벽돌만 7,500,000개가 필요한 쉽지 않은 대규모 공사였고, 설상가상으로 템스강은 지반이 연약해 언제 공사장이 무너질지 몰랐어요.

숙련된 콘월 광부들도 이건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쳤죠.

그래도 트레비식은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천 피트의 터널을 뚫는데 성공했지만 더 이상의 진행은 불가능했고 템즈 터널은 역시 어리석은 짓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죠.





뜬금없이 런던의 지반과 템스강 터널에 대해 이야기한 건 이 난제를 해결하러 나선 게 자유의 몸이 된 브루넬이었기 때문이에요

브루넬에겐 놀라운 발명품이 하나 있었거든요.

바로 실드
(현대판인 쉴드-TBM)



공학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들어보셨을 이 물건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터널과 지하철을 공사하는데 쓰이고 있는데.

이 첨단 장비의 발명은 놀랍게도 19세기 초반에 이루어졌어요.

이 물건이라면 수많은 광부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었고 브루넬은 자신이라면 템스강 터널을 완공할 수 있다 믿고 자신이 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글을 써서 템스강 공사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 했어요. 그 결과 1824년 2,128명의 주주가 £50파운드 씩을 내 템스강 지하터널을 위한 템즈 아치 웨이 컴퍼니가 창립되었죠. (주식회사의 위대함)
그리고 브루넬은 그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로 발탁 되었어요.



브루넬에겐 이 80톤짜리 쉴드 말고도 뛰어난 새 조수가 있었는데 바로 18살 난 그의 아들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이었어요.

소년은 아버지의 빛을 희미하게 만들 만큼 영민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공사에 큰 도움이 되었죠.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브루넬의 템스강 공사엔 두 가지 재앙이 있었는데 첫째는 깊이 계산이었어요.

브루넬은 템스 강바닥에서 40피트 아래로 터널을 지나가게 했는데, 이는 너무 얕았고 물먹은 지반은 공사를 내내 위험하게 만들었죠.

두 번째는 바로 템즈 아치웨이 회사의 사장인 윌리엄 스미스였어요.

스미스는 쉴 장비가 너무 비싼 장난감이라 생각했고 전통적인 방식으로도 충분히 터널을 완공할 수 있다 생각했어요.

템즈 공사의 난이도와 신기술에 대해 전혀 몰랐던 풍족한 돼지였던 그는 지위가 급격히 상승해 적이 많이 생긴 프랑스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죠.

한마디로 그는 브루넬을 미워하고 질시했어요. 브루넬은 그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대하려 했지만 두 사람이 만나면 으레 고성이 오고 갔죠.

쉽게 해결 날 문제가 아니었고 두 사람의 갈등은 깊어만 갔어요.

스미스는 위험한 상대였어요. 그는 바보였지만 어찌 되든 부자에다 사장이었고 왕실과 총리 여기저기에 브루넬의 평판을 드높이기 위해 공작을 벌였죠. 

그는 모든 비열한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일에 열중하는 브루넬을 영원히 끝장내기 위해 서서히 조심스럽게 준비했어요.

하지만 그가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었어요.. 이런 불가사의적 규모의 공사에 사고가 나지 않을 리 없으니까요.

그리고 1827년 스미스가 기다리던 사건이 터졌어요.


공사장비가 지반을 잘못 건드려 막대한 물이 터널 내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템즈 아치 웨이 회사는 물을 퍼내는데 천문학적인 추가 비용을 감당하게 된 거죠.

이 사건은 그 자체로도 브루넬의 머리털이 모두 빠지게 만들 고난이었지만 벼르고 있던 스미스는 정치적 술수를 능란하게 발휘해 브루넬을 방해하고, 또 그를 쫓아내야 한다는 여론을 만들려 했죠.

이 시기 브루넬의 건강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고 그는 자연, 방해꾼과 동시에 싸워야 했어요.



스미스의 계획은 거의 성공하는듯했지만 '결국' 브루넬은 스스로를 방어해 내는데 성공했어요. 그가 이 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재라는 게 높으신 분들의 결정이었고, 스미스는 사장직에서 쫒겨났 정부는 24만 6천 파운드의 거액을 템즈 아치 웨이 컴퍼니에 융자하기로 결정했죠. 덕분에 브루넬은 120톤짜리 새로운 실드와 함께 공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고난은 끝나지 않아서 밀려드는 템즈 강물에 펌프는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고 인부들은 익사의 위험과 더러운 템즈강의 오물에서 나온 메탄가스를 견뎌내며 하루 2시간을 작업해야 했어요. 브루넬은 아들과 함께 지상과 지하를 오가며 모든 일을 감독해야 했죠.

그럼에도 그의 헌신을 알아본 앨버트 공의 추천으로 1841년 그는 어린 빅토리아 여왕에게 훈장을 받았고

1843년 20년 가까운 공사 끝에 터널이 완공되자 백만 명의 사람이 개통식에 찾아왔고 여왕과 앨버트 공도 개통식에 찾아와 세계 어디서도 해내지 못한 대업을 끝내고 몸의 오른쪽이 마비된 늙은 공학자를 축하해주었죠.









핵소고지ost - Praying






 


"그런 것을 경험한 후 우리는 성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빅터 프랭클-








절반 도착

덥고 히잡 쓴 사람들 보이고 비행기 한번 더 타야 함

참패와 식민지 병사들. 역사

세상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제국은 어딜까요?  

과감하게 이게 정확하다고 수치를 잴 수는 없지만 여러 정황증거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꽤 확실해지죠. 

답은 틀림없이 대영제국이에요. 

그들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육지 면적 4분의 1에 유니언 잭을 꽂았어요. 
(대영제국이 식민지들에 끼친 영향에 대해선 국가마다 너무 복잡하기도 하고 논란이 있을 거 같아 굳이 언급하지 않겠어요.) 

그들은 건설가, 기술자, 상인, 붉은 옷의 군인이었고.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옷들은 현지인들에게 안 좋은 평가를 받았죠. 

영국인들이 마음대로 설치게 만들다간 거래가 끝나고 나서 붉은 옷이 몰려와 식민지로 만들어 버릴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영국 육군이든 동인도 회사 군이든) 

실제로 대영제국은 인간이 포식동물이라는 간단한 명제 아래서 활약했고. 어디에서나 싸우고 또 이겼어요. 

그런데 가끔 못 이길 때도 있었죠. 


19세기 동안 영국이 코피를 흘린 여러 전쟁이 있지만 이번에 다룰 이야긴 1차 영국-미얀마 전쟁(1824)과 1차 영국-아프간 전쟁(1839)인데 둘 다 대영제국이 구식군대를 상대로 막대한 군비를 쓰고 또 의외의 인명피해가 나온 전쟁이에요.

전자는 만 5천 명 사상, 후자는 2만 명 사상.

그나마 전자는 이겼지만, 후자는 진 데다가 사상자의 상당수가 어린이와 아녀자 같은 민간인들이어서 충격이 더 컸죠. (12000명) 

하지만 상세 내용을 살펴보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두 전쟁에서 사상자의 대다수는 인도(파키스탄) 인들이었어요.

유럽인은 비율도 적고 자연히 사상자 숫자도 적었죠.

1차 영국 버마 전쟁에서 영국군 전체 사상자 중 15000명 중 백인 사상자는 3115명.

1차 아프간 전쟁의 참사인 잘랄라바드로의 철수에선(영국 피해의 대부분이 여기서 나왔어요) 군인 4500명 중 유럽인의 비율은 고작 690명이었고 12000명의 민간인들도 백인 아녀자들이 있긴 했지만 대다수가 식민지인(인도) 들이었죠. 
백인 병사들이 겁쟁이었단 건 아니에요. 말할 필요도 없이, 호전적인 선주민이 가득한 세상 오지 구석 구석까지 머스킷 총을들고 정복할 만큼 강인하고 용감한 전열 보병들이 겁쟁이라 한다면 그건 넌센스죠.
게다가 가장 중요한 돈은 백인들 주머니에서 나갔어요.
그럼에도 이상한 사실은 전쟁 기록화엔 식민지 병사들보다 백인이 훨씬 많이 나온다는 거에요.

이 점에선 프랑스도 눈에 띄게 낫진 못해서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프랑스가 동남아에서 벌인 전쟁에서 식민지 출신 병사들이 숱하게 죽어나갔죠.

Key & Peele - Les Mis


재밌는 건 실제 19세기 이후 프랑스사도 이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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