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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온건 공화파의 독백 역사



'우리 삶의 문제들을 생각할수록, 고대 이집트인들이 죽은 자를 위해 이시스 여신과 네프티스 여신에게 의지했듯, 

우리를 평가하고 판단해 줄 존재로서 풍자의 신과 연민의 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든다. 

풍자와 연민은 좋은 조언가다.

풍자는 그녀의 웃음으로 삶을 즐겁게 하고

연민은 그녀의 눈물로 삶을 위로해 준다.

내가 의지하는 풍자의 신은 잔인하지 않아서

사랑도 아름다움도 비웃지 않는다.

친절하고 상냥한 그녀가 선사하는 미소는 편안함을 안겨준다.

나약한 존재인 우리는 흔히 악당과 바보에게 증오심과 경멸감을 품는데, 그보다는 미소를 짓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세대 교체 이야기 3 : 북미의 부싯돌

유럽에 이어 북미의 수발총 부싯돌을 살펴보려면 먼저 원주민들에 대해 알아봐야 해요. 

그 이유는 북미의 중요한 부싯돌 제작법이 이쪽에서 식민지 백인으로 역수출되었기 때문이죠. 

미리 이야기했듯 북미의 원주민들은 수발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용했고 유럽인들과 똑같이 유지 보수 문제를 겪었지만 사실 이들의 부싯돌의 조달 자체는 식민지 백인들보다 더 손쉬운 편이었어요. 

이들에겐 전통적 석기 기술이 있었고 단검과 화살촉을 만들던 기술로 수발총 부싯돌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죠. 

원주민의 수발총 부싯돌은 크게 고급품과 저급품 혹은 염가품으로 구별되었는데 첫째는 근처의 규질암을 채취해 쓰는 것이고 둘째는 해안의 돌멩이에서 고르는 것이었어요. 

이들은 이미 예전부터 숫돌로 쓰기 위해 여러 돌을 이용해 봤고 해안가 돌 중에 이런데 쓸만한 게 있단 것도 알 고 있었어요.

물론 전자는 석영(SiO2)이 조밀하게 뭉쳐서 만들어진 것이라 효과가 비교적 뛰어났지만 후자는 대충 부싯돌 역할을 하겠다 싶은 돌 파편들을 이용한 거라 효과를 믿긴 어려웠죠.

북미 원주민의 부싯돌 모양은 타원형에서부터 사각형까지 다양했는데 사각형이 주를 이루었어요.

어찌되었든 원주민들이 나름대로 부싯돌을 자가소비 하고 있던 시절에 영국 식민지인들은 상황이 훨씬 더 절박했어요.

의외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초기 영국 정착민들은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렵게 사는 경우가 많았고 유럽에선 있던 것도 이들에겐 사치품이나 구경도 못하는 물건인 경우도 흔했죠. 

석영을 채취할 광산이나 가공할 공장이 어딨겠어요?

거기다 이 청교도들 중 전통적 석공이나 총기 기술자는 드물었죠.

하지만 사냥을 하든 스스로를 지키든 총은 쏘아야 했어요.

총이 무용지물이 된 이들은 모두 전멸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아요 필요는 괴팍하고 엄격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지휘자니까요.

식민지 백인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어요 심지어 원주민들이 제작한 도구까지 재활용했죠. 

돌로만든 절구를 쪼개거나 돌 망치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래서야 수량이 나올수가 없었어요.

자연히 수발총 부싯돌은 아주 귀한 물건으로 여겨졌고. 총기 발사는 꼭 필요한 순간으로 제한되었죠.

곰이 덮치려 한다던가 지금 당장 가족을 위해 식량이 필요하다던가.. 프레데터가 나타났다던가 기타등등..
[총알과 화약, 그리고 총 자체의 수급도 보통일은 아니었어요.]

때문에 만약 스페인이나 적대적 원주민이 원정대를 보낸다면 최소한의 방어조차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궁하면 통하니 이들은 원주민들과 교역하며 원주민들의 부싯돌 제작비법을 암암리에 곁눈질로 배웠고 해안에 자갈을 가공해 부싯돌로 쓰는 조악하지만 꼭 필요한 방법을 터특하게 되었죠.

자갈이라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크기는 아님, 정도 크기 돌에서도 쓸만한 부싯돌을 많이 얻긴 어려웠죠.

해안 자갈로 부싯돌을 만드는 방법은 원재료(자갈)을 모루 역할을 하는 단단한 물체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표면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었는데 그러면 자갈은 잘고 날카로운 조각으로 나뉘어졌어요.

이는 숙련된 석공의 방법이라 보기 어려웠고 캣나소나 할 수 있었죠.

거기다 이런 자갈은 해안에 널려있으니 부싯돌 부족은 해결되었을 것 같지만... 

아무 자갈이나 다 되는게 아니라 석영성분이 들어있어야 했고, 또 충분한 크기가 되는 자갈도 드물었어요.

거기에 더 큰 문제는 제작자의 숙련도 였는데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기준 중 하나가 재료의 낭비율이에요.

프로는 훨씬 더 적은 재료를 가지고도 물건을 만들지만 아마추어는 낭비가 심한편이죠.

커다래 보이는 돌덩어리도 비숙련공이 망치질을 해서 쪼개고 나면 쓸만한 모양의 부싯돌은 드물었음. 

이후 연한재질의 망치로 모양을 좀 더 다듬을 수도 있었는데 [아니 다듬어야 했어요, 안그럼 90%확률로 못 씀]


그렇게 해안 자갈로 만든 초라한 부싯돌들, 기기묘묘 제멋대로 생긴게 개성넘치지만 무기 부품으론 낙제점에 가까움.

근대 이후로 기계, 특히 무기부품은 최대한 규격을 통일하는게 원칙이죠. 

이런 자갈 부싯돌을 사용한 원주민들과 식민지 백인들에겐 무슨일이 벌어졌을까요.


세대 교체 이야기 2 : 수발총과 부싯돌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분야에 대해 의외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이건 역덕들이 아니라 실제 역사 학자들이 논문에서 지적하는 부분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초기 수발총 산업에 대한 기록 문서는 극히 드문 편이에요. 

산업 자체가 작았고, 그나마 있는 종사자들은 상세한 기록을 남기기보단 물건을 만들어 파는 것을 중시했으며 그나마 남은 극소수의 문서들도 시간이 지나며 분실되거나 파기되는 일이 흔했죠. 
사업 관련 문서는 당사자들끼리만 알아보면 되었고 그나마 남기지 않고 구두로 끝내는 경우도 많았어요. 
당시 수발총 산업은 산업이라 부르기 어려울 만큼 작고 귀여운 규모였고 종사자들도 파트타임 업자= 소규모 제작이었고 심지어 이들 중 상당수가 문맹이었죠. 

물론 SNS가 없던 시기라 하루 일과에 대한 일기를 정성껏 쓰는 사람들이 은근히 있어서 종종 후대에 좋은 사료가 되는 케이스가 되곤 하지만, 불행히도 일기장에 시시콜콜 업무내용을 적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수발 총 생산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거기다 제대로 된 문서가 남았다 하더라도 누가 수발총 부품 관련 장부나 석공 일기장을 가보로 여기거나 "이건 300년쯤 지나 면 특이한 걸 좋아하는 학자들에게 귀중한 사료가 될 거야 "라면서 보관했겠어요?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17세기 동안 수발총의 수요가 점차 늘어나며 소모품의 소요도 함께 늘어났단 것이고, 그 소모품은 마로 부싯돌이었단 거에요.










호빵엔 팥이

삼계탕엔 닭이

수발총엔 부싯돌이 빠지면 안 되죠.

조금씩 오르던 유럽의 수발총 보급률은 세기가 지나면서 수직 상승했는데 이때 비로소 수발총용 부싯돌을 제작하는 전문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시장이 있는 곳에 기업들이 생겨나고 기업이 생기면 프로정신이 생겨나죠.

반대로 말하자면 17세기 후반 이전의 수발총용 부싯돌 생산은 불규칙적이고 소규모에 엉성했단 뜻이었죠.

17세기 후반 부싯돌 산업에 뛰어든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예전부터 오랫동안 휠락, 스냅헌스 심지어 화승총을 제작하며 기계제작, 총기 제작에 일가견이 있던 프로들이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아마추어들이었어요.
여기서 유럽과 북미의 차이가 또 나뉘었죠.

일단 이 산업의 선두주자는 프랑스였는데 프랑스 부싯돌 산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문서는 1643년의 것이에요.
비슷한 시기의 고고학적 유물들도 문서를 뒷받침해주고 있죠.
당시 프랑스 부싯돌은 칼날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칼날의 뒷부분을 둥글게 가공해 D 자 모양이 되었죠.

힐 부분이 뒤편 엣지 부분이 충돌하는 머리 부분.



영국의 경우에는 라임 모르타르(Lime mortar) 제작의 부산물로 부싯돌이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모르타르는 박격포가 아니라 벽돌 작업을 할 때 쓰는 건축용 접착제를 뜻해요.
[사실 프랑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에요. 부싯돌이 많이 나올만한 채석장이 좋은 공급원이었을 거라 추측 가능하죠]

라임 모르타르는 라임(석회)와 모래를 혼합한 가루에 물을 넣어 끈덕지게 만든 물체였는데 내구도가 떨어져서 지금은 시멘트 모르타르에 밀려 잘 쓰이지 않지만 석회가 넘쳐나는 영국에선 1930년대 심지어 그 이후에도 쓰이곤 했죠. [비단 영국뿐 아니라 유럽 자체가 석회가 풍부한 편이에요 덕분에 수질은 별로였고 대신 맥주 산업이 번창했어요.]


저게 다 하얀 석회 백악..


여하튼 저 모르타르를 만들려면 석회암을 채취해야 하는데 채석 과정에서 부산물로 석영이 나왔고 이는 부싯돌의 좋은 재료였어요.
석회 지대는 강변을 따라 많이 생성되었고 강은 운송에도 편했기에 영국의 부싯돌 제작 공장들은 템스 강변을 따라 생성되었는데 이후엔 솔즈베리의 공단으로 명맥이 이어지나 싶더니 결국 18세기에 서포크에서 부싯돌 산업을 완전히 장악했죠.

솔즈베리 스테이크..



서퍽(Suffolk)은 숙련된 제조공들(Gun-flint knappers)을 많이 두어 영국 최고 품질의 부싯돌생산지로 이름 높았는데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전쟁까지도 대량 생산을 했어요. 공장 중 가장 유명한 건 비교적 늦은 1790년에 필립 헤이워드가 10만개의 부싯돌 주문을 받고 설립한 브랜든 건플린트 컴퍼니 였는데,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동안 버밍엄의 베이커 라이플 생산자들에게 36만개의 부싯돌을 공급했죠. 이들이 아니었다면 소설 샤프스도 없었을거에요.
 서퍽의 업자 들은 값을 높게 받기 위해 철저히 담합하려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초반 에 자신들이 프랑스로 부터 들여온 생산기법이 너무도 효율적이라 이전의 3배 물량을 쏟아지기 시작했고 부싯돌값은 급격히 떨어졌죠.
아무리 업자들이 담합을 하려 해도 시장을 이길수는 없었어요.

프랑스식 공정은 단순히 생산량이 많은게 다가 아니라 더 적은 부품과 제조공을 필요로 했는데 그 예로 크림전쟁 당시 서퍽의 공장중 한 곳은 오스만 제국이 주문한 수백만개의 부싯돌을 단 1주일만에 홀로 생산해 버렸어요.

(A.J Forrest "Masters of Flint") of a Brandon Flint shop in 1876


거기다 더 진보한 퍼커션 캡이 등장하자 부싯돌의 생산량은 많아졌는데 수요는 급격히 줄었고 생존에 위협을 느낀 서퍽 장인들은 실력을 살려 각종 장식품이나 공예품, 모조 선사시대 물품 제작으로 업종을 바꾸었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죠.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2세기 뒤 이야기였고 16세기 말 영국의 공장들은 폭증하는 부싯돌 수요량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결국 영국은 체면을 구기며 프랑스에게서 부싯돌을 수입해야 했죠.


당시 영국의 부싯돌들. 검고 사각형인 것은 영국제, 호박색에 둥근것은 프랑스산





당시 영국의 부싯돌은 칼날처럼 다듬기보단 사각 모양에 가까웠는데 제작에 손이 덜 가는 디자인이었죠. 

서유럽의 두 주요 국가에 플린트 락 부싯돌 생산 공장이 첫 언급된 게 1640년대지만 진정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건 1700년대 이후였어요.

저번 글에서 언급했듯 북미에선 훨씬 빠른 속도로 플린트락이 보급되었지만 여기도 대량 생산 시설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죠.



- 다음에 계속

세대교체: 화승총에서 수발총으로


매치락을 사용하는 예니체리 - 1657년 이전 



우리는 흔히 혁신이 순식간에 하늘에서 떨어져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변화는 언제나 점진적으로 벌어지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갑작스레 세상이 바뀐 것처럼 보일 뿐이죠.

최초의 상업적 휴대전화 다이나택 8000X가 삐삐(호출기)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데 14년이 걸렸고,

증기선 SS 사바나가 1819년 최초로 대양을 건넌 이후 쾌속 범선을 바다에서 몰아내는데 4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죠.
[왜 40년이냐 하면 범선이 확실히 몰락한 게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기 때문이에요 운하를 통과 못하는 쾌속 범선은 아주 빠르게 사라져 버렸고 석탄 그을음이 천박하다 여기던 범선 선장들은 자존심을 숙이고 기선 선장들 아래로 들어가거나 실업자가 되어야 했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런 양상은 과거로 올라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편인데 1620년 등장한 수발총이 유럽에서 화승총을 몰아내는 데는 80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거의 한 세기죠.




저 옛날 핸드고너 시절부터 총(?)은 노끈이나 심지에 불을 붙여 사용했지만 방아쇠를 당겨 총을 발사하는 진정한 의미의 화승총은 15세기 중반에 처음 등장했어요.

16세기 오토만 화승총병을 그린 삽화

첫 고객은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들이었고 이후 화승총은 유럽으로 빠르게 퍼져나가며 메인스트림이 되었는데 뭐든 쓰다 보면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이고 오래된 화승총을 대체하기 위해 많은 도전자들이 등장했어요.

16세기부터 휠락, 스냅헌스, 도그락, 발틱락과 같이 잡다한 젊은 피들이 구닥다리 매치락을 밀어내고 왕좌에 오르려 경쟁했죠.

물론 그들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채 세기말과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점차 사라져 갔고 차세대 주자의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플린트락이었어요.

한마디로 스파크를 내서 화약을 점화시켜 납구슬을 쏘아보내는 데는 플린트 락이 가장 뛰어났단 뜻이었죠.

하지만 도전자를 뽑는 싸움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정작 교체 당사자인 매치락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그는 과연 디펜딩 챔피언이었죠.

세대교체 싸움은 생각만큼 일방적이지 않았거든요.

매치락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신무기를 비싸기만 하고 바보 같은 무기라 비웃곤 했어요. 마치 19세기 중반 쾌속 범선 선장이 증기선 선장을 보고 비웃었듯!



실제로 플린트락의 등장 이후에도 유럽에서 매치락은 17세기 내내 적지 않은 양이 쓰였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화승총(매치락)은 초석을 바른 노끈에 불을 붙여서 화약 접시에 박아 납총알을 발사하는 간단한 구조의 총기에요.

15세기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의 매치락 아퀘부스 

17세기 중반의 후기형 매치락 머스킷들과 맨 아래 휠락 머스킷..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전열 보병 머스킷과 모양이 비슷해지죠.



화승총은 움직이는 부품이 적은 데다 구조가 단순해서 값이 싸고 관리도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전이 더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데다 빛과 냄새 때문에 매복에 불리하며 거추장스러운 불씨의 유지가 곤란하다는 적지 않은 단점 또한 가지고 있었어요. 이 때문에 급작스러운 돌발상황에 취약했죠. [전투상황 에선 그런일이 자주 일어나곤 하죠]

여기서 끝이면 모르겠지만 또 다른 문제는 화승총이 불을 사용한다는 것이었는데 화약을 잔뜩 쌓아두고 있는 포병대에선 종종 사고로 포대 전체가 날아가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죠. [당시 수많은 직업 포병이 적이 아닌 자신의 대포 때문에 비명횡사하곤 했어요] 가장 큰 문제는 바람이나 비에 극히 취약하단 점이었는데 바람이 불거나 적은 양의 비로도 총이 자주 무용지물이 되곤 했어요. 

수발총은 이런 면에서 상당한 혁신을 이루었는데 일단 바람 때문에 불씨가 꺼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폭우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의 비가 와도 사격이 가능했어요.
만약 정 비가 걱정된다면 격발 기구와 화약 덮개 위에 빠르고 쉽게 제거 가능한 덮개를 덮어두었다가 필요시에 바로 벗기고 사격할 수 있었죠.

17세기 후반 최후기형 매치락과 그 아래 초창기 플린트락들. 모양이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어요






거기다 군대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집단이고 화승총에 익숙해있던 유럽의 군대들은 비싼 신무기를 도입하는데 크게 속도를 내지 않았죠. [한두 명이 아니라 수만 명의 무장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은 애초에 단시간 내에 끝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고.]
유명한 천재 보방이 최초의 수발총 정예부대를 조직한 게 1670년이었고

영국이 뒤를 따른 게 1685년이었어요.
최초의 등장부터 50년, 65년이 지나서야 서유럽 주요 국가들에 완편부대가 탄생한 거죠.


하지만 대양 건너 북미에선 사정이 조금 달랐는데 이는 유럽과 다른 전쟁의 양상+사냥 때문이었어요.
대규모 회전보단 소규모 접전 특히 경보병 간의 전투가 흔했던 북미 대륙에선 총기 하나하나의 성능이 더 중요했고 수발총은 더 빠른 장전과 조준, 더 높은 명중률, 외부 환경으로 부터 더 높은 신뢰성이란 이점이 있었어요.
플린트 락은 영국, 프랑스, 원주민을 가리지 않고 자주 벌였던 매복전에 적합한 물건이기도 했고, 군대를 매복시키기 좋단 점은 사냥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죠.


북미의 영국 식민지에선 영국(그리고 대륙의 다른 모든 국가들)보다 수발총이 빠르게 화승총을 몰아냈는데 그 예로 이미 1645년 플리머스 지방 집회에선 이미 화승총이 마을을 지키는 무기로써 쓸모가 없다 판단했고 1677년에 이르면 플리머스 식민지 전역에서 화승총의 퇴출을 법제화했어요. 구닥다리니까 쓰지 마

심지어 백인들뿐 아니라 인디언들도 수발총으로 무장했는데 식민지 법은 원주민들에게 총기를 판매하거나 건네주는 걸 엄격히 금했지만 적지 않은 화승총과 수발총이 원주민들에게 판매되었고 원주민들은 특히 수발총을 선호했죠.

상대가 야생동물이든 적대 부족이든 백인이든 매복해서 해치우는데 훨씬 유리했거든요.


하지만 북미인들에게도 수발총의 유지비는 골치거리였고 이와 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내려오고 있어요.

그렇다면 수발총이 화승총보다 유지비가 많이 든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품 숫자가 많다는 단순한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부싯돌이었어요.
부싯돌은 노끈보다 더 비싼 물건이었죠.
다음에 계속



역사탐정과 보조의 갑작스러운 연구일지 역사



옛날 옛날 원용팔이란 무관이 있었어요. 

그는 대한제국 시기에 살았고 유학자였지만 무과에 급제해서 왕을 호위하는 선전관을 지내다가 일본이 왕비를 시해하고 조선을 삼키려 들자 자신의 최고 신념을 지키려 고향으로 돌아갔죠. 

다시 말하지만 그는 무인이자 유학자였어요. 만약 그가 오늘 살았다면 정훈장교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는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원주 진위대의 김구현이 그를 배반하고 밀고했고 회유를 거절하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어요. 

이게 제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였고. 

묘비에도 적혀있으며 언론사에서 그를 다룰 때도 나오던 이야기죠. 

이건 역사 이전에 집안 이야기였고 거기엔 조금의 의심이 들어갈 자리도 없었어요. 

하지만 이는 엄연한 역사였고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의 말처럼 선행은 집에서부터 실천해야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했다간 한쪽에 치우칠 수 있죠. 

특히나 인터넷의 시대에 많은 아마추어 역덕들이 현장답사(?)의 중요성을 습관적으로 잊곤 해요.
사람 없는 배가 무슨 소용이냐는 앨리스의 말처럼 탐사 없는 연구에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추리 만화를 그리는 한 후배의 답사기가 특기할 부분이 조금 있는 거 같아 소개해요.




평소 실천을 좋아하는 후배는 현조부에 대한 제 글을 보고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아 서대문 형무소에 들렀어요. [뭔가 멋이 안 나니 앞으론 후배 대신 그냥 탐정이라 부를게요.]

하지만 수감자 목록에 원용팔은 보이지 않았고 탐정은 직원에게 물어보았지만 " 명단에 누락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 무언가 도움이 될 정보를 얻지는 못했어요.

만약 형무소의 빨간 벽돌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언가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지만. 벽은 그냥 빨간색일 뿐 탐정의 관심사에는 고집스럽게도 침묵을 지켰죠.


형무소에서 나온 탐정은 제게 연락을 했는데.

전 그때 한창 작업 중이라 바빴지만 당황스러운 이야기에 잠시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현조부는 분명 서대문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는데..

잠시 고민하던 저는 후배의 열정을 보고 일일 탐정의 보조가 되기로 했죠.

물론 레딩에 있는 제가 한국에 갈 수는 없으니 자료조사의 무대는 자연히 국사편찬위원회라는 바다가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항해가 빠르고 잘 풀리기를 기원하며 닻을 올렸죠.





후배와 제가 풀려는 문제는 "원용팔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는가, 아니라면 어디서 순국했는가, 그렇다면 왜 서대문 형무소로 알려졌는가" 였어요.

바쁘다면서 왜 그런 재미없는 문제를 뒤져보냐 물어보실 수도 있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구석이 있죠.

일단 국사편찬위원회를 검색하며 제가 겪은 가장 큰 장벽은 한자였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 같아요.

20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작성된 각종 기록, 보고, 연구서는 과거로 내려갈수록 한자의 숫자와 한글의 비율이 비슷해졌고.

탐정님과 전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며 네이버 사전의 도움을 받아 당시 보고서를 위주로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후배가 처음 찾아낸 자료는 의병 원용팔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각사 등록의 기록인데 1905년 9월 29일 그가 체포되어 경성으로 이송되었다고 기록되어있죠.

하지만 정황증거를 보면 당시 대한제국의 반일 의병활동에 대해 환히 꿰뚫고 있던 건 일본 제국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당시 자료 중 가장 디테일하고 방대한 수량을 자랑하는 게 주한 일본 공사 통감부 보고서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통감부는 제천, 원주 일대의 의병활동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 특기할 건1906년 1월 6일 재판 기록이에요. 통역을 대동한 일본 재판부가 그에게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물었고 그는 일본이 국모를 시해하고 여러 잘못을 저질러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 의병을 일으켰다 말하고 있어요. (중간에 섞인 한자문을 번역하느라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수반검사는 공소장을 낭독하고 배석판사는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피고에게 물었다. 피고는 조용히 침착하게 분개의 어조를 띠고 대요 아래와 같이 진술하였다. “내가 의병을 일으킴은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충성의 격동으로 거사를 하였다. 나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그 관계가 이웃의 의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일본으로서 선린의 정의를 완전히 하려고 한다면 왜 국모의 수적을 안 내놓느냐? 또 어찌하여 일본에 있는 도망자를 인도하고 우리나라로 하여금 처치케 하지 않는가? 일본으로서 좋게 그 의를 수행한다면 우리는 영구 일본인에게 경사하겠지만 오히려 의병을 왜 일으키겠는가? 그런데 일본은 이 길을 안 걷고 또 우리정부는 도둑과 같이 욕심쟁이에 대해 보복의 일을 안 하니까 우리 국민은 결코 무능한 정부에 의존할 수 없어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의병을 일으킴은 정히 그 점이다.”

이후 검사는 그에게 일본인 우체부와 조선인 1명을 살해한 죄를 묻지만 그는 이가 사실이 아니라 말했고, 보고서는 진행된 재판이 증거가 불충분하며 고문 협박에 의존하는 재판이었다 지적하는데 이는 흥미로운 점이에요 일본 시점으로 기록된 보고서임에도 재판에 대해 자신들에게 불리한 부분도 그대로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여기에서 심리상의 광경 혹은 형사증명서 불충분에 그치려고 하는 점이 없지 않아 그래서 본직 및 이사는 각 조사한 증빙 재료를 지적하여 조사를 요구하였는데 어찌된 일이냐. 공판 전의 취조에 있어 하등의 증거 재료도 수집하지 않고 대충 심문을 하고 형식적인 것으로 공판을 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사실에 의하여 심문을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본직 등은 지적한 증거 재료 및 사실을 검사 판사는 지득할 수 없다고 명언하였다. 一. 판사는 피고에 대하여 일체 사실을 자백치 않으면 고문을 할 것이라고 고하고 동시에 고문기를 가져올 것을 명하기에 본직은 그 신문방법에 부당성을 고하고 고문을 가할 필요가 없음을 설명하며 고문을 정지케 하고 새로 제반에 증거 수집방법을 제시하고 본직 및 이사도 증거 자료를 만들 것을 약속하고 공판 연기를 요구하였더니 어떤 이의 없이 오는 9일 재개정하기로 결정짓고 일단 폐정하였다. 이상의 실황으로서 재판수속의 불완전한 것은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사태이다. 더욱 오는 개정 일까지는 웬만한 증거재료를 수집하여 동원에 보내 본직 등도 역시 이날 다시 입회할 예정임으로 우선 이만 보고합니다.

1906년 1월 6일





이후 통감부문서에 원용팔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한국 총사와 여러 자료는 그가 회유를 거절하고 옥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문제는 어느 감옥인지 정확히 나와있지 않다는 건데. 

언론사와 지역 자료들에선 그가 경성감옥에서 순국했다고 하죠. 
경성감옥은 어디일까요? 바로 서대문형무소의 첫 이름이었어요.

항일 운동가들을 가두기 위해 일본이 1907년 건설을 시작해 8년에 완공한 서대문 형무소의 원래 이름은 경성 감옥이었고 이후 서대문 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8년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죠. 

후배는 여기서 문제 해결을 외쳤어요. "단순한 명단 유실!..."
이면 좋겠지만 그가 옥사한 건 1906년 3월이었고 서대문형무소가 공사를 시작 한 것은 1907년이란 사실을 제가 지적했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네요.. 그렇다면 원용팔이 압송되고 옥사한 '경성감옥' '혹은 어디일까요?

또 다른 후보는 마포에 존재했던 '마포 형무소'에요.
일제의 유명한 형무소 중 하나인 이곳의 원래 이름 역시 '경성 감옥'이었죠.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는데 마포형무소가 개설된 건1911년이에요. 서대문형무소보다도 늦죠.

그렇다면 도대체 의문의 경성감옥은 어디일까요?



심기일전한 후배는 국편위의 각사등록 부문에서 용팔의 옥사를 보고하는 '경무청' 기록을 찾아냈어요.

경무청은 갑오개혁 때 의금부 산하 조선의 최대 옥사인 전옥서를 흡수하며 감옥 이름을 '감옥서'로 바꾸었죠.
감옥서는 바로 경성 종로에 위치해 있었어요.

그렇다면 원용팔은 종로의 경무청 감옥서로 압송되어서 순국했고 경성감옥은 종로의 경무청을 뜻하게 되죠. 

문제 해결.. 하지만 탐정의 의문이 깨끗이 사라진 건 아니었는데, 왜 원용팔 순국한 곳이 서대문 형무소로 알려지게 된 걸까요?

단지 '경성에 있는 감옥' =>'경성감옥'이라는비슷한 이름으로 만들어진 착오일 수도 있죠.

탐정의 끈질김을 가진 후배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위키피디아 서대문 형무소 항목에서 1908년 '감옥서'에서 기결수들을 이송 받았다는 대목을 찾아냈어요. 이때 의병들이 경성감옥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이후로도 독립운동가들은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지게 되었죠. 이런 연유로 언론과 후손들은 그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은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 같다는 게 탐정의 결론이에요.


역사탐정과 그 보조의 사소한 조사를 글로 옮기고 나니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건 몇 가지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해도 이 글이 길고 지루하고 새삼스러운 글처럼 여겨지지 않을까에요.

다만 그렇다 해도 직접 발품을 마다하지 않고 열의와 노력을 다해 조사를 돕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 준 탐정님에 대한 고마움 이면 글을 쓸 충분한 이유가 되겠죠.




데드링어


DEADRINGER by Michael Reeder 


우린 과거인들이 만든 전설들을 보며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만 오늘날에도 땅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릴 혼란스럽게 만들고 종종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기도 하죠. 

중세인들이 악령과 악마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성당과 부적에 의지하고 성인들에게 기도를 올렸듯 우리도 숫자 4를 피하고 이삿날은 손 없는날을 택하곤 해요. 

한 사회 안에 어떤 미신이 암묵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그건 수십 년, 심지어 한 세기가 넘는 생명력을 자랑하며 이어지기도 하죠.
미신은 잘 죽지 않거든요. 

그런 미신 중 일부는 아예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 일상용어로써 당당히 사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는데 
그중 가장 출세한 케이스는 독일의 전설 '도플갱어' doppelganger에요.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하고 그를 만나면 불운을 겪거나 심지어 죽는다는 육지판 플라잉 더치맨스러운 이야기는 이젠 누군가와 똑 닮은 사람을 지칭하는 일상용어가 되었죠. 

물론 이야기 자체는 어디까지나 미신이지만, 확률적으로 볼 때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지구상에 6명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똑같진 않아도 닮은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이 존재해요. 

도플갱어만큼 한국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똑같은 의미로 '데드링어' Deadringer라는 단어가 있는데.
처음 이 단어를 접하는 사람은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돼요.
Dead는 죽은 Ringer는 종 치는 사람... 합치면 죽은 종 치는 사람?
이게 어쩌다 도플갱어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을까요.

어디까지나 전설의 영역인 도플갱어와는 다르게 이 단어는 19세기 경마용어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고어지만 한세기 전 영어에서 동사 Ring에는 짝퉁이란 뉘앙스에 가까운 '복제품'이라는 의미가 있었고 Ringer는 이름이나 혈통을 속이는 부정 경주말을 뜻했어요.
Dead는 '정확히'라는 의미의 'Dead Centre'의 앞부분에서 따온 것이고 합치면 '정확히 복제품' 혹은 '정확히 짝퉁'이란 의미였죠.

왜 조합이 그따위냐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영어가 원래 그럼.

-끝-



여기서 끝나면 초자연적 괴물이나 유령보단 훨씬 밋밋하고 재미없는 사연이지만,
어원에 대해 이보단 좀 더 흥미로운 주장도 있어요.

그 주장을 소개하자면, 중세기 관속에 종을 넣어둔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에요. 
차라리 믿고 싶지 않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중세기엔 종종 완전히 죽지 않은 사람을 무덤에 넣는 일이 벌어지곤 했는데 가끔 운이 없는 경우엔 관 속에서 다시 깨어나기도 했죠.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이런 일은 지금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에요.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은 관 안에 종을 넣어놓아 만약 죽은이가 관속에서 살아나면 묘지기가 듣고 구해줄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렇게 벨을 울려서 살아난 사람이 거리에 돌아다니면 그가 죽었다 생각했던 지인들은 죽은 사람과 똑같은 사람을 보았다며 혼비백산하곤 했고 여기서 유래된 단어가 죽은 자가 종을 울린다 = 데드링어로 정착되었단 이야기죠.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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